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사군 한반도설 식민사관 주장 사건 (문단 편집) ==== 한백겸과 정약용의 연구 ==== 조선 후기로 들어서 '사실 추구 성향을 띤 역사지리학'이 나타났다. 시작은 한백겸 선생이 쓴 『동국지리지』[* 『동국지리지』는 한백겸(1552~1615)이 광해군 연간(1614~1615)에 저술한 책으로, 각 국가의 종족, 국가별 강역 변동 등을 문헌을 통해 고증하는 방법으로 기술했다.]다. 이 책 뒤로 역사 지리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연구서들이 나왔는데, '근대역사학과 지리학의 학문적 기초를 마련한 것'이기도 하였다.[*가 송호정, 『실학자들의 역사지리관과 고조선 한사군 연구』, 경기문화재단 실학박물관, 『실학자들의 한국 고대사 인식』, 경인문화사, 2012, 23~24쪽] 한백겸은 주자성리학의 도덕적 편사 규범에 구애받지 않고 우리나라 고대의 강역을 문헌 고증을 하는 방법으로 연구했다. 한백겸 선생은, 삼국 이전시대에는 한반도가 한강을 중심으로 남과 북으로 나뉘어 역사를 전개한 것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고조선에 대해서도 연구하였는데 한 나라와 있는 경계인 패수는 청천강, 왕검성이 있는 열수는 한강으로 비정했다. 한백겸은 패수가 조선의 북계이며 대동강은 아닐 것이고, 또 마자수가 있는데 이 강은 서개마를 나와 서안평으로 들어간 것, 압록강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청천강은 압록강과 대동강 사이에 있으니 패수는 청천강으로 비정할 수 있다고 하였다. 송호정 박사는 이런 입론을 '패수와 관련하여 중요한 자료들을 정확하게 짚어낸 것으로 현재 학계의 수준에서 봐도 설득력이 높다.'고 평가했다. 한백겸 선생은 낙랑군의 위치는 이렇게 판단했다. 낙랑군은 평양으로, 현도군은 함흥지방, 임둔군은 강릉 일대, 진번의 경우만 불명하여 조선, 임둔, 진국 사이에 비정하고 있다. 송호정 박사가 평하길 '이러한 연구 내용은 이후 한사군 위치에 대한 대체적인 틀을 세웠다.' 하였다. [*가] 또한 [[정약용]] 선생도 고대사 연구를 했는데 그걸 책으로 낸게 [[아방강역고|아방강역고]]이며 이런 연구는 '조선 후기에 상고시기의 역사 · 지리 연구는 정약용에 의해 한 단계 진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책의 목적 중 하나는 기존 역사책의 오류를 바로 잡으려는 것이었다. 정약용은 선생은 『삼국사기』와 『동국여지승람』의 잘못을 지적한 바 있다. 『아방강역고』-『조선고』 에서 정약용은 고조선의 중심지가 한반도이며 한사군도 진번을 빼면 모두 압록강 남쪽에 있던 것으로 봤다. 또한 이 『조선고』에서 말하길 "지금 사람들이 혹 의심하기를 최초에 조선이 요동에 있지 않았는가 하기도 하나, 원래 『사기』 소진열전, 화식열전 및 기타에서 다 조선, 요동, 진번 등을 처음부터 갈라서 써놓은즉 이것들을 혼동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였다. 실제로 학계에서도 『사기』소진열전에서는 기원전 4세기에 요동 지역이 조선과 병렬되었고, 요동이 연나라에 속하지 않고 조선과도 구분되어 나오는데, 이때 '조선요동'은 정약용이 본 것처럼과 '조선'과 '요동'을 병렬된 것으로 본다. [*나 송호정, 『실학자들의 역사지리관과 고조선 한사군 연구』, 경기문화재단 실학박물관, 『실학자들의 한국 고대사 인식』, 경인문화사, 2012, 30~36쪽] 정약용은 조선과 요동군은 처음부터 다른 것이며 조선의 중심은 평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조선왕 만의 국도였던 왕검이 요동군 험독현에 있었다고 한 후안인 응소의 견해를 반박하기도 했다. 또한 고조선을 처음부터 광대한 '영토'를 가진 대국이라 생각한 일부 사람들의 생각을 배제하고 고조선도 처음에는 일정한 좁은 지역(정약용 선생은 그것을 현재 우리나라 서북부라고 생각)에서 출발하여 점점 광대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했다.[*나 송호정, 『실학자들의 역사지리관과 고조선 한사군 연구』, 경기문화재단 실학박물관, 『실학자들의 한국 고대사 인식』, 경인문화사, 2012, 36쪽] 다산은 조선이라는 명칭은 원래 기자가 도읍한 바 있는 평양에서 기인했을 것이라고 말했고 『위략』에는 연나라의 [[진개]]가 조선의 서방 2천리를 빼앗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북경에서부터 의주까지는 2천리 1백리가 되니 진개의 조선 침략 후 서한 초에 국경으로 정해진 패수는 압록강일 것이라고 했다. '한나라가 일어나 다시 요동의 고새를 수리했으니, 이미 [[랴오허|요하]]를 건넜는데 어찌 다시 요수로 경계를 삼는단 말인가? 요하와 압록강 사이에 다시 큰 강이 없다면 패수가 곧 압록강이다.'고 봤다. [*다 송호정, 『실학자들의 역사지리관과 고조선 한사군 연구』, 경기문화재단 실학박물관, 『실학자들의 한국 고대사 인식』, 경인문화사, 2012, 37~38] 다산은 역사에서 패수로 인식된 강이 4개(대동강, 압록강, 요동의 헌우락, 평산 저탄수)가 있다고 하며 하나하나 상세한 고증을 통해 설명했다. 또한 패수를 뜻매김하길 『수경』에서는 패수를 평양의 대동강으로 인식했는데 역도원이 『수경주』를 쓰면서 스승의 말을 근거 없이 바궈서 후세 사람들에게 혼란을 줬다고 비판했으며 『사기』『조선열전』 내용에서 패수는 압록강을 잘못 인식한 것으라 주장했다. 그리고 『한서』『지리지』에서는 압록강을 마자수로, 대동강을 패수로 구분지어 혼동되지 않게 되었다고 봤다. [*다] 정약용은 한사군이 진번을 제외하고 모두 압록강 남쪽에 있던 것으로 봤다. 낙랑이 평양이며, 현토는 함경도, 임둔은 평양 서남부 임진강 일대로 해석했다. 대방군도 요동이 아니라 임진강 하류 지방으로 비정했다. [*라 송호정, 『실학자들의 역사지리관과 고조선 한사군 연구』, 경기문화재단 실학박물관, 『실학자들의 한국 고대사 인식』, 경인문화사, 2012, 39~40쪽] 한사군에서 진번군은 만주의 [[동가강]] 이북지역까지 영역을 넓힌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이유는 진번 관련 단편적인 기사가 한군현 설치 이전시기 자료에도 나오고, 일부 기록이 압록강 이북에 위치한 것으로 봤기에 그렇다. [*라] 낙랑군의 영역은 평안도와 황해도로 봤고 낙랑군의 이러한 위치 비정은 낙랑이 요동에도 있었다고 하는 당시 조선의 유자들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였다. 다산은 낙랑은 압록강 이서 지역에는 없었다고 하며, 조선 유자들이 낙랑이 요동에 있다고한 주장을 비판했다. 현토군의 경우는 다산은 함경남도 남부 지역으로 봤다. 그러면서 현토를 단일한 것으로 보지 않고 사료에 나오는 것을 면밀히 검토하며 두번이나 이동하였다고 보았다. 송호정 박사는 다산이 '제2현도군과 제3현도군의 존재를 파악'해냈다고 평가하였다. 또한 다산은 임둔은 강원도 지역으로 봤다. [*라] 정약용의 연구는 현대한국의 한국사학자들한테도 영향을 끼쳐서 이어지는 것으로 패수 압록강설은 쓰다 소치키기가 아닌 정약용이 완성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덕일은 [[조선시대]]부터 거론되어 오던 낙랑군 평양설에 대해서 [[식민사학]]이라 하고 있다. >식민사학자들에게 '한사군'은 일종의 메시아다. 요즘은 한사군 대신에 한군현 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마치 자신들이 식민지배 찬양 논리를 극복한 것 처럼 말 장난을 한다. (……)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한사군은 한반도 북부에 있어야 한다. >------ >실제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는 평양 지역이 아니라 하북성 노룡현 일대이다. 그래서 나머지 모든 논리는 헛소리가 되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영원히 우리의 역사관을 지배하신다'는 교리와 '식민사학은 우리의 영원한 신앙'이라는 도그마에 따라 낙랑군 조선현을 평양이라는 둥 대동강 남쪽의 대동면 토성리라는 둥 우기는 것이다. >------ > 이나바 이와키치는 대동강이라고 주장하고, 이병도는 청천강이라고 주장한 패수가 왜 압록강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단지 쓰다 소키치의 설을 추종한 노태돈의 설을 따른 것 뿐이다. 이유가 무엇인가? 쓰다 소치키가 이병도의 와사다대 스승이기 때문이다. 한국 식민학계는 이병도와 쓰다 소키치의 설이 다를 때는 쓰다 소키치의 설을 따른다. >------ >[[이덕일]], 『매국의 역사학, 어디까지 왔나』, 2015, 128~129, 151~152쪽 여기서 이덕일은 '아무런 설명이 없다.'면서 '쓰다 소키치의 설을 추종한 노태돈의 설을 따른 것'이라는 근거 없는 확신을 하고, 이를 전제하여 '한국 식민학계는 이병도와 쓰다 소치키의 설이 다를 때는 쓰다 소키치의 설을 따른다.'고 원천봉쇄를 하고자 하였다. 물론 패수가 압록강이라는 주장에 대해 학계에서 아무 설명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거짓이다. 패수 압록강설에 대한 설명은 이미 조선시대부터 여러 번 다루어졌다. 그리고 한국 학계가 쓰다 소키치와 이병도의 설 중 하나를 골라서 따른다는 말도 이덕일의 헛소리일 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